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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32[모래나가] 악당
특기자로서 나가의 삶은 절제의 삶이었다.
끝을 모르는 가능성을 잘라 규격에 맞춘다. 그것은 상식이었고 인격이었으며 본성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 규격은 어느 쪽이든 극한으로 엇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평범한 사람'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가는 평범한 사람 수준의 욕심과 정의감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진짜' 평범한 이들과 차이 나는 점이 있었다. 그들은 체념을 통해서 터득하는 것을 나가는 학습을 통해서 사사받은 것이다.
그 별거 아닌것 같은 차이는 나가가 스스로 칭하는 '평범한 일상'때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는 스푼이라는 '비일상'적인 기관에 속해버렸다.
알던 사람이 죽는다. 자신이 위험에 처한다. 적이 죽는다. 그리고 그러한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은 경험이 쌓인다. 그와 동시에 나가 자신이 강했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터득과 배움의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
절제는 억제를 불러왔다.
"숨쉬는 것만큼 쉬웠지. 별다른 죄책감도 없었어. 그는 악당이니까."
나가는 오랜만에 뇌 속을 파고든 과거에 눈을 떴다. 꿈인지 회상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자의적 해석이 없었으며, 회상이라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솔직히 죽인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뒤의 붉은색과 흰색의 대비가 너무 강렬했다. 무척이나 맑은 날의 대낮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잘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더 이상 잠은 오지 않는다.
그저 그 백모래의 시체를 기점으로 단편적인 것들이 떠오른다. 일단 오수는 틀렸다. 자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어긋났다. 힘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죄라고 한단 말인가. 나가는 스스로 죄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죄라고 칭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떠오른다. 명백한 적의와 공포의 시선이. 그리고 무분별하게 쏟아진 악의가. 어느 한계까지는 나가도 이해했다.
누구인 줄 모르겠지만 선량하고 아름답게 생긴 남자가
-악당인 백모래가
아무런 동정도 안타까움도 표현하지 않는 소년에게
-히어로인 자신에게
무참하게 머리를 포함한 사지가 찢어지는 방법으로 살해당했으니까.
나가도 자신이 심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마움 없이 비난만을 반복했다. 그것은 백모래가 명백한 악당인 것도,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과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나가의 강력한 힘이었다.
'너라면 인도적으로 제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가는 곧 그것이 핑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나가를 더 이상 '강력한 힘으로 자신을 지켜주는 히어로'가 아니라 '잔인한 살인마' 혹은 '위험인물'로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가는 악당이 되었다.
그런 영웅이 싫다면 악당이 되어주마.
특별한 야망도, 삐뚤어진 가치관도, 선천적 불행도 모두 가지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악당이 될 가능성이 한없이 0에 가까웠던 나가는 악당이 되었다. 의식적으로 억제하던 무언가의 한계가, 교육받은 가치관이, 부조리한 비난을 통해서 부서졌다.
영웅이 되는 것도 쉬웠지만, 악당이 되는 것은 그보다 더 쉬웠다.
"백모래 당신이 옳았네."
문득 나가는 그의 유언 아닌 유언이 떠올랐다. '무고한 시민을 인질로 삼은 악당의 작태'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났던 영웅으로서의 나가는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었다. 악당이 하는 헛소리니까. 하지만 지금은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해 놓았던 것처럼 선명히 들린다.
날 죽이고 영웅이 되. 그리고 나와 같은 곳으로 오는거야.
그 말을 하고 그는 웃었던가? 아니면 웃기도 전에 피와 살이 뭉개진 고기 덩어리가 되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가는 '영웅'이었을 적에는 느낄 수 없었던, 그의 일반적인 정의감으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 차오름을 느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통찰에 가깝기도 했다. 논리의 비약이나, 확신이기도 했다.
"백모래 당신은... 정말 사랑을 했구나."
그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하지만 그 대신 지독한 순수함에 대한 감동이 있었다.
나가는 왠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악당이 된 보답으로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필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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