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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3. 8. 02:45[나가다나] 배움
개인으로서 최고위급의 무위를 자랑하는 나가는 익숙한 교복을 벗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히어로가 되서 졸업한 이후까지 고수하던 복장이다. 날개달린 인간도, 허리깨쯤 밖에 오지않는 여자애도 있는 마당에 제 교복이 어디가 눈에 띄어 상징이 되겠냐만은 다나가 그러라했기에 그러했다.
윗사람,어른이 시키면 별 불만없이 그려려니하고 따른다. 자신과 별 다를바 없는 친구들이 그들의 상식과 잣대에 맞추어 뭐라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다. 그것이 어릴적부터 주입받고 배어온 나가가 사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것을 무시하라 이르는 이도 있었다. 네 멋대로 살라고, 네 있는 힘을 참지 말라고, 순간순간의 충동에 솔직해지라 악당은 외쳤다. 백모래 그 사랑을 위해 그리 살았던 그 남자는 나가를 있는힘껏 흔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나가에게 네 힘이 있다면 세계정복도 꿈은 아니라했다.
하지만 애초에 나가는 백모래와 마찬가지로 세계정복을 꿈 꾼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처럼 사랑을 위해서 모든걸 바칠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나가는 결국 그 어떤것도 이루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린 남자에게서 단 한가지를 배웠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가질 수 없는 건 가질 수 없더라."
이 세상은 소설이 아니기에 그러했다. 설사 세계를 정복한다하더라도 그는 그가 원한것을 손에 넣지 못했을것이다.
그가 한 악행을 알기에 동정조차 가지 않는 남자였지만 나가에게 기적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만은 고마웠다. 특기라는 초능력이 있는 세상이기에 깜박하고 착각할뻔 했다.
나가는 서늘한 셔츠에 팔을 넣었다.
교복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것은 다나가 허락한 복장이 아니였다.
나가는 백모래처럼 사랑에 목마른 아이가 아니기에 사랑에 모든것을 바치지 않았다. 나가는 사랑이 최선을 다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 믿지 않았다. 나가는 절제할 줄 알았고 타협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다나와 오수의 결혼식에서 박수를 칠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려왔지만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다른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백모래가 말한것처럼 악마가 준 끝을 모르는 재능의 유무였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걸 바치지도 않았으며 다나의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았지만...
모든것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서장님."
"나가."
나가는 다나앞에 섰다. 나가가 고등학교때부터 눈높이가 엇비슷했던 둘은 지금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이젠 다나씨라고 불러야 할까요?"
애초에 나가에게 모잘랐던것은 경험뿐이었다. 목표가 생긴 나가는 금방 그의 가치를 찾아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는 더이상 그녀의 부하가 아니였다.
"어색한데."
"그래도 공적인 자리에서까지 실수하면 안되니까요. 특히 어르신들 앞에서요."
"그놈의 윗대가리들."
다나는 백모래 일당이 소탕되자마자 스푼을 위험세력으로 몰아 해체시키려던 작자들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어떻게 알았는지 가짜 나이프의 이호까지 들먹이며 이번에야 말로 그러겠다 으름장을 놓곤했었다. 그리고,
"그래도 나름 살날 얼마 안남은 양반들이라고요?"
그것을 막은 것이 나가. 그녀의 옛 부하였다.
나가는 빙그래 웃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역할을 강탈했다. 드디어 가까스로 동등해졌다. 다나의 짝인 오수는 그 집안의 힘에서 비롯되지만 나가는 제 자신의 힘이다. 그는 아직 젊고 앞으로 더 올라갈 여력도 있다.
물론 그것으로 다나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진 않을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자신을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나가는 만족할 줄 알았다. 그는 백모래에게 그처럼 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지 않아요?"
다나는 교복을 벗은 나가의 모습이, 자신을 향한 그 미소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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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42[갤리민호]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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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41[나가다나] 장례식
그는 그녀와의 첫만남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그것을 아쉬워해본적 없었다.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사람, 앞으로도 지겹도록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사람과의 사소한 과거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특히 그처럼 사소한것에 감정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무심한 성격이라면.
"서장님."
그러나 그런 그라도 오늘 지금 만큼은 그 사소한 사실이 견딜 수 없을만큼 괴로웠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너? 은행에서 처음 보고 스카웃을 결심했지.'던졌던, 기억나지 않는 첫만남이 기억속에 없는 것이 울만큼 억울해졌다.
"서장님."
그때는 서장과 부하직원이 아니라, 히어로와 일반시민의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아쉬워졌다.
"대답... 해주세요."
기억나지도 않는 첫 만남이 그리운 것은 지금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사사는 저 답지 않게 굵은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리며 오열하는 후배를 바라보았다. 후배에게는 처음 겪은 동료의 죽음일 것이다. 자신도 한팀이었던 선배들이 죽었을때 저렇게 울었던가. 그때의 감정은 너무나 격렬하고 특이해서 과거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슬픈것은 아니지만, 마냥 슬퍼만 하기에는 자신은 살아있었다.
나가의 손아귀가 아무것도 움켜쥐지 못하고 장례식장 바닥만을 긁었다. 무엇을 쥐고 싶어하는 것인지 나가 그 스스로도 몰랐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 설사 지구 최강이라는 말도 안되는 품질 보증 딱지가 붙은 자신이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것 같던 여자의 혼이라고 쥐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사사는 떨리는 나가의 등에 손바닥을 얹어 두드려 주고 싶었다. 의지가 되던 상사의 죽음은 그도 무척 슬프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후배를 위로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까마귀 인간인 그의 본능이 경고했다.
그리고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생물을 이용하고자 하는 개인 혹은 단체는 그 수를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가장 강하다 할지라도, 그 힘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세력도 카리스마도 경험도 없는 고등학생은 이용을 당할 운명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를 가장 처음 발견한것은 그렇다할 욕심도 없으며, 능력자라는 관점에서 보았을때 지극히 상식적인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는 젊은 여자였다. 무엇보다고 그녀는 적어도 무력이라는 점에서 그 생물처럼 최고라는 정점을 찍고 있었다. 생물의 목을 죄고 방향을 일러주는 족쇄였으나, 그것은 느슨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든든한 가장 '최선'의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족쇄가 풀렸다.
스푼에 남은 이들, 같은 팀인 혜나와 사사를 포함한, 이들 중에서 다나보다 나가에게 가까운 이들은 있다. 하지만 다나보다 나가에게 의지가 될만큼 강한 이는 없었다. 그의 손 대신에 자신의 손을 더럽히겠다고, 그가 하지 못한 일이라도 자신은 할 수 있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스푼은 나가의 새로운 족쇄가 되어 줄 수 없다.
사사의 손은 나가의 몸에 닿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는 듯 나가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자신이 히어로임을, 아니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선택이었다.
바다를 가르고 지형을 바꾸는 힘을 가진 나가가 택할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았다. 깊고 깊은 심해, 높고 높은 상공. 숨조차 쉬기 힘든 곳에 다달아서야 나가는 비로소 제 울분을 토할 수 있었다.
"죽고 싶어요."
서장님. 죽는다면 서장님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사조차 짐작하지 못한 또 다른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나가가 다나를 사랑한다는 뜬금없고도 비극적인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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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40[이자미카]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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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39[토리코마] 비독점계약 1,2
# 코마츠 TS
1.
구르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IGO가 제 역할을 하지 않은 과거라면 그 사람의 과거가 제대로 된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그러한 질문은 대단한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선두에 서서 이끌어가는 한 축인 토리코는 그 불문율을 누구보다도 잘 숙지하고 있었다. 과거에 얽매여 괴로워하기에 그는 너무나 강했지만, 그의 과거 또한 평탄하지 않았다. 먹고 먹히는 야생의 전쟁터에서 인간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굶주린 배를 움켜쥐었는가. 독이 든 식재조차 구하기 힘들어 제 살을 뜯어 먹었다.
그렇기에 토리코는 그가 한번도 물은 적 없고, 코마츠가 한번도 말해준적 없는 그녀의 과거를 멋대로 상상했다. 식재료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코마츠라면 분명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컸을 것이다. 아마 피가 이어진 제대로된 부모 형제 아래에서 양육되었겠지. 살아남기 위한 협력이 아닌 첫인상으로 시작되는 제대로 된 인간관계. 먹지 않으면 먹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
그렇다고 이미 지나간 일에 질투를 하거나 시기심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코마츠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상처받고 목숨의 위험을 받을지언정 남을 해하지 못하는 코마츠의 성품은 그에게 기적 그 자체였다. 스스로 인간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그에게 너무나도 '인간적인' 코마츠는 이상향이었다. 그녀의 곁에 있다면 최소한의 것만 남고 마모된 자신의 인간성도 지킬 수 있을것이다.
코마츠는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자고 있다. 토리코는 흙바닥 위에 바로 깔린 침낭에서 빼꼼 나온 코마츠의 얼굴을 관찰했다. 하루종일 산을 탄것이 체력에 부쳤는지 누가 없어가도 모르게 곤히 자고있다. 좋게 말해도 예쁜 얼굴이 아니다. 생긴걸로만 따지면 남자인 자신이나 써니와 린 남매가 훨씬 보기 좋다. 그러나 보기 좋다고 맛좋은 식재료가 아니라는 것은 미식가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침낭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화상과 자상을 덮은 굳은 살. 무거운 조리기구를 다루다가 생긴 단단한 어깨와 팔 근육. 굵어진 손목. 요리에 방해되지 않도록 남자처럼 짧은 머리카락. 화장기 없는 피부. 코마츠는 여자가 아닌 요리인으로서는 다른 이와 비견되지 않는 가치가 있었다. 자신의 콤비가 될정도로.
실력과 인간성이 반비례하는 이 세계에서 예외인 코마츠는 소중했다. 토리코는 그런 코마츠를 콤비로 삼은 자신의 운에 만족감을 느끼며 마찬가지로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코마츠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바닥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그녀의 가방을 건드렸다. 간단한 양념과 요리도구, 그리고 구르메 케이스로 가득할 가방에 낯선 물건이 보였다.
찢어질 듯 바스락거리는 종잇장을 조심스럽게 폈다. 코마츠를 제것으로 생각하는 토리코에게 남의 편지를 본다는 죄책감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편지가 아니었다.
유서
그것도 제대로 자필로 적은다음 잊지않고 지장까지 찍은 완벽한 유언장이었다. 그러나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로 따박따박 적힌 내용은 제대로 준비했다기엔 지나치게 짧았다.
-만약 본인이 사망했을 경우 모든 재산은 IGO에 환원한다.
-XXXX년 X월 X일.
-코마츠.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죽기 전에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이나,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요구, 자신의 짧은 삶에 대한 감상, 그 어느것도 없었다. 토리코가 당연히 있을것이라 기대했던, 콤비인 토리코에게조차 따로 남기는 말은 없었다.
억샌 손아귀에서 유서가 구겨졌다.
토리코는 유서를 작성한 날짜를 확인했다. 그와 코마츠가 처음으로 헌팅을 갔던 날이다. 가라라 악어. 콤비가 되기 훨씬 전의 헌팅. 토리코는 그제서야 그때 코마츠에게 유서를 쓰도록 충고한것이 자신임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정말로 쓸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이것을 품에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그가 지켜줄 것이니 이런 유서따위 불필요하다. 그때는, 첫 헌팅때는 토리코 자신이 코마츠가 어떤 요리인인지 몰랐기에 유서를 준비하게 한것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럼, 지금은 코마츠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는가?'
뒤통수를 거세가 맞은 감각이다. 제가 알고있는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을 의지하는 코마츠라면 이런 사무적인 유서를 남길리 없다. 하지만 이 단정한 글씨는 분명 코마츠의 필체이며, 그 유서는 코마츠의 가방에서 나왔다. 저가 알고 있던 코마츠는 코마츠가 아닌가.
토리코는 유서를 봉투째로 모닥불에 던져넣고 눈을 감았다. 내일 헌팅을 위해선 지금 자야한다. 코마츠의 알지 못한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콤비를 깨는건 말도 안된다. 일단은 헌팅을 마치고, 그 식재로 요리를 해먹으며 말을 걸어보자.
다음날 새벽, 코마츠는 가방 앞주머니가 열려 있는것을 발견했다. 방수용 비닐 안의 유언장이 사라져있다. 설마 이 숲에 유언장을 노리는 특이한 생물이 살리는 없다. 설사 있더라도 한마리의 맹수인 토리코의 영역 안쪽으로 들어올리가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한 사람.
'새로 작성해야 겠네.'
코마츠는 못 본 척하며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토리코는 만찬을 즐긴 후 남은 식재를 상인에게 넘겼다. 그리고 그제서야 코마츠에게 유서에 관한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코마츠는 그의 요리를 필요로하는 손님들에게 서둘러서 돌아간 참이다. 아마 잠도 자지 못하고 꼬박 하루를 더 요리해야 할것이다.
뭐 다음에 이야기하면 되겠지.
오늘도 코마츠는 헤어질때 잔뜩 아쉬운 얼굴로 '토리코씨. 다음 헌팅때에도 꼭 같이가요. 혹시 배가 고프시면 호텔 레스토랑에 들리시고요!'라며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때까지 졸라댔다. 토리코와 코마츠가 콤비사이가 아니였다면 영락없이 헤어지는 연인에게 투정을 부리는 모양새다.
어쩌면 코마츠도 린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지. 뭐.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자만심이 아니라, 자신이 젊고, 능력있으며 잘생겼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코코만큼은 아니지만 사랑한다며 따라붙는 여성팬들도 많은데 모른다면 바보다. 거기에 코마츠가 추가되었다고 달라질 건 아니다. 만약 코마츠가 사랑에 눈이 멀어 선을 넘으려고하면 자신이 새롭게 선을 그으면 된다. 코마츠도 아주 머리가 나쁜편은 아니니 알아서 처신하겠지.
그런 코마츠가 일부러 그런 유서를 헌팅때 들고왔을리가 없다. 짐작해보건데, 첫 헌팅때 급하게 쓴 유서를 까먹고 아직도 들고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언급이 없는것도 이해가 간다. 그땐 콤비도 아니였으니까.
토리코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편이 덜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2.
어느날 불쑥 찾아온 코코가 물었다. "너는 이대로 괜찮은거야?"
코마츠는 영문을 모르겠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에게 괜찮지 않은것이 무엇이 있을까. 사천왕중의 한명인 토리코와 콤비가 되면서 그전이라면 만나보지 못할 진귀한 식재료를 다루게 되었다. 자신의 요리를 먹은 토리코를 포함한 사람들의 반응도 과분할 정도로 긍정적이다. 여기서 더 좋아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최상의 상태이다. 그런데 어째서 코코씨가 안부를 묻는것인가.
코코는 망설이다가 코마츠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춘 후 다시 물었다. 코마츠는 맞잡은 손을 빼지 않았다.
"토리코는 너를 단순히 콤비로 볼 뿐이야."
싸구려 타블로지에서는 토리코와 코마츠를 엮어, 마치 코마츠를 이 세기의 신데렐라마냥 묘사한다. 팔리는 것을 제일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미형에 유명한 미식가와 그와 만나기 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요리사라는 남녀 콤비는 소설을 쓰기에 완벽한 소재였으니까. 만약 정말 토리코와 코마츠가 그 소설마냥 콤비를 넘어선 사이였다면 코코도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말도 안되는 풍문의 희생자는 코마츠가 될것이다.
코마츠가 토리코를 사랑한다할지라도 토리코는 상관도 하지 않을 것이며, 코마츠가 새롭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남의 눈에는 유명인을 앞세워 이름을 높힌다음 남자를 버린 악녀처럼 보일것이다. 코마츠가 사랑하는 남자를 포함해서.
그리고 코마츠는 상처받겠지.
코코는 자신의 손을 맞잡는 상냥한 코마츠가 그렇게 되는것을 원치 않았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왜요? 코마츠는 순진하게 되물었다.
코코는 코마츠의 커다란 눈동자에 집중했다. 검은 동공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도 코코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다. 십초가량의 시간이 흐르고 코코는 놀랐다. 지금 코마츠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코마츠군."
"네."
"토리코는 너를 멋대로 휘두르고 있을뿐이야."
"코코씨의 독설은 여전하네요."
그래도 토리코를 좋아한다는 의미일까.
상상만으로도 독이 뇌까지 침범당한 감각이다. 코코는 이대로 코마츠의 눈과 코와 입을 막고 손발을 묶어 제 집에 가져다 두고 싶어졌다. 독인간이라는 악명과는 다르게 코코는 그루메 헌법에 위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적 없는 깨끗한 인간이다. 아니 적어도 흔적을 남긴 적은 없었다. 거기에 써니나 제브라와는 다르게 코마츠와 콤비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친적도 없었다. 흔적만 잘 지운다면 그를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집도 킷스가 없다면 찾아오기 힘든 외진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참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괴물을 인간으로 보는 '인간' 코마츠였으니까.
충동을 참고나니 새로운 희망섞인 의문이 떠올랐다 '그것이 아니라면 코마츠군도 토리코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것인가?' 그럴리가 없지만. 상냥한 코마츠가, 인간인 코마츠가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다.
"코마츠 쉐프!"
그리고 그 순간 주방에서 누군가가 코마츠를 찾았는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려퍼졌다. 급하게 돌아간 고개에 코코는 아쉬움을 느끼며 손을 놓았다.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는 것이 옳을것 같다. 설사 긍정적인 대답을 듣는다해도 자신은 아직 그것에 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저 코코씨."
"가 봐."
"저 식사라도 하고가시는게,"
"약속이 있어서."
거짓말이지만. 너를 만나러 집에서 나왔다는 것은 숨기고 싶으니까. 코코는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비웃으며 말했다.
"아. 코코씨는 바쁘시니까. 죄송해요."
"아니야. 그럼 다음에 보자."
"네!"
코마츠는 급하게 주방으로 달려갔다. 복도에 멀뚱히 서있던 코코는 그 뒷모습이 사라지자 비로소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자신은 얼마나 모든 감각을 코마츠에게 집중한 것인가. 얼마나 초조하게 그녀의 반응을 살폈으면, 자신의 영역에 저 위험한 짐승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건가. 그가 살아왔던 먹고 먹히는 세계였다면, 진즉에 짐승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토리코."
꺾이는 코너에 숨어있던 푸른 머리의 거대한 사내가 그제야 제 모습과 함께 존재감을 드러냈다.
"코코... 너..."
토리코는 자신이 왜 코마츠와 코코의 대화를 들으며 숨었는지, 왜 코마츠가 주방으로 돌아간 지금에서야 몸을 드러내는지 몰랐다. 이성이 아닌 본능이 시킨 행동이었다.
"코마츠에게 무슨 말을 한거야."
"글쎄."
차마 들릴까 큰 소리를 내지 못한체 토리코는 코코의 멱살을 잡아 끌었다. 코코는 힘없이 끌려가며 가볍게 대답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자신과 코마츠군 사이의 대화를 전부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크게 상관없었다. 비록 그간의 게으름 탓으로 미식가로서의 이름값은 토리코보다 낮다고할지라도 코코 그도 토리코의 형제이자 같은 사천왕중의 한명이었으니까.
"나는 코마츠군에게 우정의 충고를 해주었을 뿐이야."
코코는 멱살을 잡은 토리코의 손을 잡고 힘을 주었다. 엇비슷한 악력이 팽팽하게 대치하다 토리코가 손을 풀면서 끝났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못 들었어?"
내가 약속이 있다고 코마츠군에게 말한거, 분명 엿들었을건데? 서로를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가장 잘 아는 형제인 그들이다. 토리코는 코코가 말하지 않은 뒷말을 능히 짐작하였다.
그럼 이만. 코코는 끝까지 웃는 모습으로 뒤돌아서 출구로 걸어갔다. 토리코는 그 자리에서 주먹을 쥐고 혀를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코코를 따라가 끝까지 추궁하는 꼴불견을 보이거나, 애꿎은 코마츠를 향해 화풀이를 할것같았다.
머리속에서 코마츠의 짧은 유언이 떠나질 않았다.
백전노장인 세츠노는 감히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게에 들어오는 애송이를 향해 깔깔 비웃어주었다. 오늘 식당을 열거란 말에 자신의 콤비를 대려오겠다던 놈이 혼자왔으니, 그 사정은 안봐도 뻔했다. 바람을 맞은거지. 천하의 미식 사천왕 토리코가.
토리코와 코마츠 콤비에 옛날 옛적 자신과 파트너였던 지로를 겹쳐보곤 했던 세츠노에게 이것은 썩 유쾌한 이벤트였다.
"코마츠군과 같이 온다더니?"
코마츠의 몫의 전체까지 입안으로 쓸어담는 토리코를 향해 세츠노는 운을 띄웠다.
"6성 호텔 주방장이라..."
"이치짱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안가르쳤나 보네."
"바쁜건 사실인데..."
"직접 들은건 아닌게지? 코마츠군이 내 초대를 거절할리가 없으니까."
코마츠는 식재료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선배 요리사에 대한 존경심을 갖춘 요리인이니까.
"코코... 그 자식이."
세츠노는 토리코의 입에서 나오는 익숙한 이름에 아침드라마를 보는 것마냥 흥미진진해졌다. 자고로 젊은것들은 이리저리 사랑때문에 마음고생도 해봐야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오백년 넘게 산 그녀에게도 인생이란 짧고 아까운 것이었으니까.
"삼각관계인게냐?"
"엥?"
잔뜩 기대하고 물었는데, 반응은 영 시원찮다. 세츠노는 눈을 모로 떴다.
"벌써 빼앗긴건가. 그래서 콤비 해체 기자회견은 언제 할 예정인게야?"
"아니 갑자기 왜 그런말이 나오는건데!"
"코마츠군에게 차였으니, 콤비는 해체지."
"안차였어! 아니 그 전에 왜 다들 나랑 코마츠를 엮지 못해서 안달인건데! 코코 자식도 그러고!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세츠노는 흥분한 토리코의 입에 방금 완성한 교자 1인분을 통째로 집어 던졌다. 이거 먹고 흥분을 가라 앉힌다음 천천히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남녀 사이란 알 수 없는게지. 특히 콤비처럼 서로를 철썩같이 믿고 의지해야하는 사이라면."
"하지만 코마츠는 예외야."
육즙과 마늘향이 얇은 피 안에서 어우러지는 예술을 느끼며 교자를 꿀떡 삼킨 토리코가 딱잘라 말했다. 코마츠와 자신은 살아온 세계가 다르다. 자신은 짐승이었으며, 코마츠는 인간이다. 써니의 여동생인 린이라면 모를까, 짐승인 자신이 인간과 남녀의 정을 나눈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예외?"
"먹고 먹히는 세계에서 살아온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요리 잘하는 여자잖아. 콤비라면 모를까, 그 이상은 무리라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제 아픔을, 과거를, 흉폭함을 이해받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것이 아닐까. 공감받고 싶어하는건 당연한 욕심이다. 그리고 토리코가 생각했을때, 코마츠에게 그러한 조건은 무리였다. 인간이기에 곁에 두고 싶지만, 인간이기에 연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노인는 어린애 다운 오만한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어린애다운 발상이었다. 인간의 감정이 그렇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것였다면 세상은 진즉에 좀더 엉망이 되었겠지. 그리고 그 어린애는 그만큼 사람을 보는 눈도 없었다. 평범이라. 식재료에게 그토록 사랑받는 여자에게 '평범'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리가 없다.
"먹고 먹히는 세계라? 재미있는 말이구나. 그래, 남들이 보기엔 네녀석 포함한 사천왕들은 지옥에서 태어난 악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
세츠노에게는 그저 꼬마 도깨비처럼 보일뿐이지만.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던 토리코는 세츠노의 어조의 변화를 감지했다.
"먹고 먹히는 세상만이 지옥은 아닌게야."
세츠노는 깎을 필요도 없이 닳아버린 코마츠의 뭉툭한 손끝을 생각했다. 그것은 벌써부터 노인인 자신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토리코는 또 다시 코마츠의 짧디 짧은 유언이 생각났다. 어째서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코마츠의 유서는 자신의 것과 한자도 틀림없이 똑같았다.
생각에 빠진 토리코에게 세츠노는 마지막 디저트까지 차례대로 대접했고, 그는 그것을 모조리 먹어치운 다음 제 값을 지불하고 나섰다. 발걸음은 자연히 IGO 직속 호텔로 향했다.
방금 만찬 준비를 막 마친 코마츠는 토리코를 기쁘게 맞았다. 토리코는 인사후에 가타부타 말없이 곧바로 물었다. '나와 열애설이 도는게 괜찮아?'라고. 코마츠는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대답은 토리코가 기대하거나 원한것이 아니었다.
"아, 그런것까지 신경써주셔서 고마워요."
단순히 갑작스러운 호의에 대한 감사였다. 열애설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였다.
"하지만 괜찮아요."
코마츠는 정말로 괜찮았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예쁘지 않다. 그렇다고 애교가 많거나 살가운 여성스러운 성격도 아니다. 그런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랑받은 적이 없었다. 동기인 타케와 잠시 사귄적이 있지만, 결국 코마츠의 성격에 질려 차였었다. 사실 그것은 코마츠에게 연애라기 보다는 사랑받지 못한 고아 둘이서 열심히 상처를 햝아주던 위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그렇기에 코마츠는 포기했다. 인간을 사랑하는것도 사랑받는 것도.
자연히 눈은 매일 다듬고 요리하던 식재로 돌아갔다. 식재만은 그녀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주었다. 일 대 일로 대응되는 관계에 그녀는 빠져들었다. 그렇게 코마츠는 오성 호텔의 쉐프가 되었고, 사천왕인 토리코의 콤비가 되었다.
"정말이에요. 저는 '그런 것'을 포기했는걸요."
코마츠는 한줌의 아쉬움 없이 덧붙였다.
토리코는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리며 저녁밥은 필요없다고 말꼬리를 돌렸다. 세츠노 할멈의 가게에서 이미 먹었다고. 저만빼고 먹었다며 입을 삐죽 내미는 코마츠에게 토리코는 친절하게 메뉴와 감상을 읊어주었다. 죄다 듣더니 기어코 비슷한 메뉴를 만들어 보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코마츠에게 홀에서 기다리겠다 말한 토리코는 그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자신이 얼마나 바보였는가를 자각했다.
코마츠도 구르메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처럼 '미식에 매료된 인간'이었다. 재산도, 사랑도, 가족도, 친우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미식'아래에 두는, 미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것도 하찮게 여기며 기꺼이 거세시키는.
그녀에게 사랑이란 식재에게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거기에 그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녀에게 '평범한 인간'이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평범하다면, 자신도 평범할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자신과 같은 인종임을 깨달은 순간, 제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사랑이 보답받는 날은 없겠지.
"아... 그래도 코코보다는 나은가."
코마츠가 저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은 하지 않으니까. 코리코는 차가운 바닥위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상하게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은 후였음에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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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38[야마츠나] 危
봉고래 데치모는 무서운가?
열에 아홉은 그 질문에 대해 긍정을 표할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뇌의 용량이 부족하거나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거나, 갓 태어나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사와다 츠나요시가 무서운가? 라는 질문에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일단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니까. 이탈리아와 북미 마피아의 정점에 선 대부의 이름이 일본계라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이름의 주인을 아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에 따른 대답은 극명하게 나뉜다.
봉고래 패밀리의 마피아거나 봉고래의 산하에 속해있는 마피아라면, 그 젊은 대부의 인품을 생각하고 쓴 웃음을 지을 것이다. 마피아가 아니지만 그의 지인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밖의 그 이름을 아는 마피아라면 앞선 질문을 받았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봉고래 비의 수호자, 야마모토 타케시, 봉고래 데치모의 중학교 동창이자 측근중에서도 최측근인 남자는 두 질문 모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그것을 묻지는 않겠지만, 근본이 솔직하고 거짓을 싫어하는 그라면 그럴것이다.
"츠나."
야마모토는 원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사이에 세라믹 강판이 들어간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무실 한켠에 마련되어 있는 응접용 소파에서 츠나요시는 몸을 깊숙히 파묻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거침없이 그에게로 걸어가 바로 옆에 앉았다.
"임무는 완료했어."
마찬가지로 고개를 젖히고 팔을 벌려 몸을 한껏 기댄 야마모토는 츠나요시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야마모토의 양복은 잔뜩 구김이 가고 풀어해쳐 있었고, 츠나요시는 목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 위에 니트 소재의 가디건을 입었다. 그것 때문인지 같은 나이의 동양인 남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달랐다.
야마모토가 한숨을 돌릴쯤에 츠나요시는 입을 열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야마모토의 땀냄새와 체취로도 가려지지 않은 물과 피의 비린내를 느꼈다.
"결과는?"
"보고서는 깔끔하게 정리되서 올라오겠지만."
야마모토는 벌써부터 찡그려지는 친우의 미간을 보았다. 그는 야마모토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몸을 말았다. 얼굴의 반을 화상투성이의 손이 가렸다.
"전멸이야."
봉고래의 전멸이 아니다. 그러한 결과를 제 사람을 끔찍하게 아끼는 사와다 츠나요시가 허락할리가 없다. 전멸한 것은 남미에서 넘어온 신 마피아 세력으로, 봉고래를 포함한 이탈리아 마피아의 율법을 거부한 이들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반 수 이상을 야마모토가 죽였다. 야마모토는 불꽃을 둘렀음에도 혼란한 상황에서 피를 뒤집어썼던 시구레 긴토키를 떠올렸다.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미안해."
그리고 그 임무를 명령한 최종 결정자이자 책임자는 사와다 츠나요시, 지금 사과하는 자신의 친우이다.
츠나요시는 미안했다. 친구이자 동료에게 살인을 명령한 것도, 그가 자신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게 된 것도, 그가 마피아가 된 것도. 모든 것이 미안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모든 것은 사와다 츠나요시의 책임이었다.
"괜찮아."
야마모토는 폐부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참으며 간신히 웃었다.
'츠나에게 자각은 없다.'
이제 친구의 키는 평균을 웃돌아 왠만한 이는 내려다 볼 정도까지 되었다. 지금처럼 상반신을 곱아도 그리 유약해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사와다 츠나요시가 지금보다 한참 작았을 때도 그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키가 한뼘은 더 작고, 몸무게도 그가 한참 무거웠을 때 츠나요시는 야마모토의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야마모토의 무한한 신뢰와 우정을 얻었다.
위로 뻗힌 머리 때문에 키가 야마모토와 엇비슷하고, 키에 비하여 가볍지 않은 몸무게를 가진 지금, 츠나요시는 그 어릴적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아닌 야마모토를 포함한 그 주위의 사람들을 위해서 행동한다. 그리고 패밀리와 그 관계자들에게 존경과 충성을 받는다.
그렇기에 아무도 사와다 츠나요시를 탓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해서 행동한다. 그 선택이 설사 자신에게 상처가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봉고래의 초직감에 의하여 선택된 최선의 형태이다. 모든 원망과 상처는 사와다 츠나요시를 거역하는 자들에게 돌아간다.
그의 친구 츠나는 언제나 순결하며 피해자이다.
야마모토는 고개를 돌렸다. 괴로워하는 츠나가 보였다. 언제나 희생양을 자처하는 그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대죄인 살인을 해도, 살인을 명령해도 죄가 없다. 언제나 완벽하게 무죄이다. 차마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최선이잖아?"
야마모토 타케시, 개인의 무력으로는 세계에서 손 꼽히는 그는 진심전력으로 그의 옆에 있는 자의 완전함이 무서웠다.
"하지만."
링도 불꽃도, 그 모든 인의와 상식을 벗어난 힘도 이보다는 인간적이다.
실수로라도 죄를 짓지 않고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는 이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하긴 백란도 유니도 모두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 셋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츠나요시가 뒷말을 잇지 못했던 연결사를 되씹었다.
무서울만큼 완벽하지만 안아주고 싶을 만큼 가련하다. 그의 강함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게 된다.
"정말 괜찮아."
야마모토는 눈을 가린 츠나요시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품에 넣었다. 츠나요시는 울지 않았다.
이미 손을 때기에는 너무 깊숙히 들어와 버렸다. 그러니 괜찮다. 이것으로 괜찮은거다. 야마모토는 맞다은 온기에 살인으로 날뛰었던 무엇인가가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안심했다. 앞으로도 계속 츠나를 무서워하고 질려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괜찮다.
그것을 넘어서 나는 그가 필요하다.
야마모토는 미소를 준비하며 손을 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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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36[야마츠나] 자살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모자란
야마모토 타케시, 그는 뛰어난 검사이다.
야마모토 타케시, 그는 살인검을 쓴다.
야마모토 타케시, 그는 인간을 죽인다.
야마모토 타케시, 그는 야마모토 타케시라는 인간을 죽이려고 했었다.
-
야마모토 타케시는 하나의 물음이 혀에서 맴돌아 근질거렸다. 묻고 싶었다. 그 누구라도 좋으니 묻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묻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궁금증은 그가 알 수 없는 연산에 의해서 문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모호했던 개념이 확실해 졌다.
“남을 죽이는 것과, 자신을 죽이는 것. 그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어렵다고 생각해?”
“남.”
그토록 망설였던 질문이지만 대답은 빨리 돌아왔다. 세상의 인간을 자신과 자신이 아닌 이로 나누는 명쾌한 기준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런 이분법적인 질문에서 기대할 수 있는 대답이란 단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단순한 대답을 듣는 순간 야마모토는 맥이 빠졌다.
그런 야마모토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람보는 휴대용 게임기에 몰두하였다. 람보에게는 답을 하는 것에 아무런 망설임도 그런 의문을 던지는 것에 대한 저의에 대한 의심도 없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자신의 답변 뒤에 '자신'이 아닌 '남'을 선택한 이유를 덧붙이지 않았다. 같은 질문을 묻는 그런 너덜너덜거리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쉴 새 없이 손가락을 놀렸다.
부지런히 하얗고 길지만 화상 자국이 있는 손가락을 놀리는 람보는 이제 이차 성징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 매력을 가졌다. 그는 그림으로 그린 듯 한 전형적인 라틴계 미남이었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이라든지 그 아래로 보이는 초록빛 눈은 제법 근사했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그 미소년의 성장과정을 그대로 지켜보았고 모두가 인정하는 스트레이트였다. 그의 눈에 람보는 어린 아들이나 동생처럼 어리게 보였다.
비록, 평범한 아버지나 형이라면 아들이나 동생이 두 가지 살인중 하나를 거리낌 없이 선택한다는 것에 대해 혼을 내거나 다그칠 것이다.
“역시 그런가?”
야마모토는 그저 가볍게 긍정했다. 그런 대답을 유도해낼 질문을 던진 주제에 아버지나 형처럼 군다는 것도 넌센스이다. 어찌되었던 저 모습이 람보의 모습이다. 한 없이 어리게 보이고 실제로도 어리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금지된 모든 것을 경험해 보았다. 그는 어른의 것과 아기의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람보 자체도 나이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야마모토 자신도 그럴 것이다. '그' 때문에.
뿅-뿅-
유치하게 들릴 법한 전자음이 고풍스럽게 꾸며둔 방에 지속적으로 울렸다.
일본 게임을 좋아하는 철없는 십대 소년과 길고 늘씬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그 방에서 그들의 보스를 기다리고 있다. 한쪽은 서양인이고 한쪽은 동양인이다. 한쪽은 입가를 심술궂게 올리고 있고 한쪽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그러나 둘 다 살인자이자 마피아다.
마피아도 그냥 마피아가 아니다. 범죄자임도 범죄자가 되지 않는 신분이다. 그들은 이탈리아 마피아이자 거대 마피아의 수뇌급인 ‘수호자’의 칭호를 십대 때부터 그리고 아직 나이가 한 자리일때부터 부여받았다. 세간에서 널리 말해지는 인의를 저버렸다. 그와 함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벗어났다. 비틀리고 비틀려 탄생이라는 시작과 죽음이라는 마지막만이 명확한 인간들이다.
하지만 확실히 죽음을 향해서 곧게 걸어가고 있다. 적어도 걸어가는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뿅-
전자음이 멈췄다.
“제길, 거의 다 됐었는데.”
“하하. 또 진거야?”
탁자위에 발을 올리고 엉덩이를 소파 끝에 걸친 불량한 자세로 게임을 하던 람보는 거칠게 게임기를 던지며 짜증냈다. 분명히 그 나이 또래의 소년에게는 비쌀 휴대용 게임기가 벽에 부딪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졌지만 람보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악! 아까 네가 말 걸어서 그런 거라고!”
“임무 도중에 제일 나불나불 떠드는 녀석이.”
봉고래의 7명의 수호자 중에서 무쿠로와 히바리를 포함시킨다 할지라도 함께 임무 수행하기가 꺼려지는 인물로 람보가 꼽혀지기 일쑤이다. 죽어도 람보와 행동하기는 싫다고 결사반대를 하는 조직원도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수많은 변명과 핑계 중 하나가 람보의 지랄 맞은 입버릇이다. 안하무인으로 자라나 언제 어디서나 자기 할 말은 다 해버린다. 야마모토도 람보가 떠드는 바람에 잔뜩 고생한 적이 있다.
“그것보다 이게 100배, 아니 1000배는 더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람보는 숫제 소파가 제 침대인 마냥 엎드려 투덜댔다. 날 때부터 마피아였던, 살상무기를 장난감 삼아 자란 람보에게 몸 전체를 움직이는 현실에서의 살인이 손가락을 까딱거려 귀엽게 눈을 반짝이는 색색의 캐릭터를 죽이는 것보다 더 쉬웠다.
“살인이라도?”
“엉, 이거 진짜 난이도 극악이야. 근데 아까부터 웬 갑자기 살인타령? 봉고래가 뭐라 했어?”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이미 부서진 게임에 흥미가 떨어진 람보가 다른 쪽으로 호기심을 보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온갖 일에 간섭하는 게 람보였고 그것은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헤에. 하긴, 형들을 죽이는 것보다는 게임이 쉬울 것 같아.”
람보가 ‘형’이라고 칭하는 이들은 봉고래의 보스 사와다 츠나요시를 포함한 수호자들과 그에게 전투를 가르친 후타이다.
“그전에 리본, 아니 이핀을 이기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어때?”
“악! 너 진짜!”
이핀은 고 무술의 유파를 잇고 있는 중국마피아계의 스타플레이어이다. 가냘픈 몸을 가진, 람보와 마찬가지로 마피아로는 보이지 않는 등 여로 모로 그와 비슷한 그녀는 람보와 10년지기 동갑내기 친구이지만 그와는 다르게 엄청난 노력파이다. 평소 그런 이핀의 따가운 질책에 부끄럽고 화나고 짜증나고 억울한 복합적 감정이 응어리 졌던 람보는 야마모토의 도발에 간단히 넘어갔다.
람보는 벌떡 일어나 씩씩거렸고, 야마모토는 귀여운 동생의 모습에 눈을 접었다.
람보가 차마 함부로 싸움을 걸지는 못해서 노려보며 서있는데 벽과 같이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무슨 일 있어?”
“여어, 츠나.” “봉고래!”
츠나는 비와 번개의 수호자가 그들의 보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겁에 질린 부하에게 보고 받았다. 그래서 부하를 위로하고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 요량으로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츠나가 기다리던 얼굴중 하나는 완전히 새 빨개져있었다.
다른 조직원들은 한참 상관인 람보가 짜증을 내는 것을 알고 람보를 피해서 그들에게 츠나가 온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부하가 화났다는 이유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츠나는 봉고래의 보스가 아닐 것이다. 물론 람보가 츠나에게는 거의 아들이나 어린 동생과 마찬가지라는 것과 람보도 츠나의 말이라면 복종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야마모토에게 나랑 진심으로 싸우라고 명령해!”
열렬히 츠나를 불렀던 람보가 여유롭게 의자에 기대어 웃고 있는 타케시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였다.
“수호자들 간에 불필요한 싸움은 불가해.”
“봉고래잖아!”
절대 왕정시대의 왕과 같이 유일하게 봉고래의 법(rule)을 어길 수 있는 신분인 봉고래 데치모 사와다 츠나요시이다. 그런 그에게 람보는 5살 난 어린아이처럼 때를 썼다. 그리고 츠나는 10년이 지나 겉모습만은 근사해진 주제에 속 알맹이는 변하지 않은 람보의 모습에 야마모토처럼 웃었다.
“람보, 너 이번에 또 훈련 빠졌었지. 바질이 실망했다고.”
“악! 그게 갑자기 왜 나와!”
“타케시를 이기려면 훈련에 빠지지 말아야지?”
람보의 어깨가 움츠려들고 고개는 숙여진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방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 츠나와 야마모토는 10년간 키만 큰 듯한 람보가 그의 어릴 적처럼 입술을 꼭 깨물고 바들바들 떨고 있을 것을 안다.
츠나에게 혼나서가 아니라, 제 분에 이기지 못해서.
“지금도 야구 바보쯤은 이길 수 있어!”
드디어 폭발했다.
이름을 부르더라도, 남에게 칭할 때는 꼬박꼬박 ‘형’이라고 칭하던 녀석이 막말을 하였다. 그러나 람보는 나이에 의한 상하관계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이탈리아인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는, 아니 모른다고 하여도 별 상관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넓은 야마모토는 그저 람보가 요즘 고쿠데라와 놀기 시작했는가를 고민했다.
야마모토는 야구를 그만 두었다. 하지만 그는 고쿠데라의 호칭에 의해 야구에 대해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항상 여유롭고 낙천적인 야마모토를 못마땅해 하는 고쿠데라가가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상상돼서 설핏 웃어버렸다.
분명 분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겠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리고 다시는 그 호칭을 쓰지 않을 것이다.
봉고래 전체에 금지령을 내릴지도 모른다. 같은 수호자여도 콘실리어인 고쿠데라의 명령은 봉고래의 위엄을 위해서, 남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복종해야 하니까.
그렇기에 야마모토는 그 사실을 고쿠데라 앞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뭐….뭐가 웃긴 거야!”
람보는 야마모토의 미소를 보더니 무슨 상상을 했는지 잔뜩 성을 내며 방을 나섰다.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문이 빠른 속도로 닫히면서 커다란 소음을 만들었다.
“어라, 저 녀석 너에게 장기 휴가 달라고 조르러 왔는데.”
“하하, 그래?”
부드럽게 웃는 야마모토의 보스, 사와다에게서 희미한 피냄새가 났다. 혈향이라고 칭하기에는 그리 달콤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악취가.
어울리지 않는다.
야마모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츠나는 비린내나 붉은색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츠나의 무기는 상대를 태워버리고 그 편이 좋다. 괜히 적을 살리기 위해 피를 묻히는 것이 싫다. 그것이 적의 피가 아니라 그의 피라고 할지라도.
“이핀하고 어디 여행이라고 갈 생각인가.”
“츠나, 늦었네.”
야마모토는 아직도 서서 웃고 있는 츠나를 바라보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동공과 홍채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검은 눈과 연한 갈색의 눈이 대충이나마 엇비슷하게 마주친다. 작았던 자신의 친구는 자신보다는 작지만 어디서 키가 크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라버렸다.
전투에 적합하게.
“마찰이 생겨버렸거든.”
“네 운전수인 하야토는 어디에 쓰게?”
왜 보스가 부하를 이용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위험 속으로 뛰어드냐? 라는 질문을 단순 명쾌의 대명사인 그 답지 않게 돌려서 말했다. 야마모토 타케시, 그가 고쿠데라 하야토와 마찬가지로 이용당하는 것이 당연한 부하이기 때문이다.
“고쿠데라군은 지금 필리핀에 있어.”
“그래서 혼자 싸웠다고?”
“내가 혼자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는 수호자에 의해서 수호되어야만 해.”
“야마모토. 고쿠데라군은 필리핀에 사사가와 선배는 바리아와 함께 임무수행 중이고 크롬은 빈디체를 조사 중이야. 히바리 선배는 알다시피……. 구름이라고.”
나는 북 이탈리아 패밀리들의 회담에 감시역으로 참가했었지. 라고 야마모토는 짜증났던 일주일을 회상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7 종류의 불꽃과 봉고래 링. 그리고 츠나를 제외하고 봉고래에는 6명의 수호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츠나가 언급한 수호자는 야마모토를 제외하고 4명. 1명이 모자란다.
“람보는?”
길어지는 불편한 대화에 볼을 긁적이던 츠나가 야마모터의 지적에 손을 모아 쥐었다.
“타케시, 아직 람보는 어려.”
자신은 그 나이에 살인을 했다. 그런 자신보다 벌써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에게 그토록 나이가 중요하냐는 질문을 삼키며 야마모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렇게 말해도 그의 보스는 변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리고, 너무 움직이지 않으면 실전감각이 떨어진다고.”
필요에 의해서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한다고 말하는 츠나는 말했다. 그 모습은 마피아가 되기 전 10년 전과 닮아 있어서 조금 슬펐다.
언제나 상냥하지만.
봉고래가 비상 전시 체제에 들어갔다. 웬만한 유럽의 왕조보다 오래인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봉고래이기에 그 백단위의 시간이 지나갈 동안 존속의 위기가 없었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보다 심각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고쿠데라 하야토. 봉고래의 콘실리어가 판단했다.
봉고래를 지탱해오던 것은 다른 마피아 조직과는 다르게 제왕의 자리를 지키며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할 수 있던 가장 큰 축은 충성심 높은 부하들도, 밀도 있는 조직망도, 기술 독점으로 인한 오버 테크놀리지의 무력도 아니었다.
초직감.
봉고래 그 자체를 상징하던 그 힘이 사라졌다. 초대 봉고래의 피를 이은 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분야를 막론한 체 시대를 뛰어넘고 학계를 뒤흔든 논문을 몇 편이나 썼으며 다국적 기업에서 의뢰를 할 정도의 두뇌는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였다. 그리고 최선의 선택을 하였다. 하지만 정작 같은 피가 흐르는 심장은 사와다 츠나요시, 이탈리아계 일본인 청년의 부재 그 자체에 통곡하여 쥐어짜 내려졌다.
그리고 고쿠데라 하야토의 10년지기 친구이자 그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에 속하는 무조건적인 낙천주의자인 야마모토 타케시는.
웃고 있지 않았다.
검 혹은 야구 배트를 들었을 때에는 그의 표정이 긴장감이 감도는 진지함으로 굳어지고는 했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그의 모든 표정은 선천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웃음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긴장감도 진지함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의 애병은 커녕 싸구려 왜도 한 자루도 들고 있지 않고 있다.
“하하하하.”
메마른 얼굴에 간헐적인 ‘웃음소리’만이 튀어나왔다.
그가 밟고 있는 공간은 그의 발 크기보다 작았다. 이탈리아의 이름난 장인이 만든 구두의 앞부분은 아무것도 밟고 있지 않았다. 아니, 발아래에 있는 것을 단순히 ‘밟는다’라고 규정한다면 그의 구두코는 몇 십 미터가 넘는 공기층을 밟고 있었다.
“10년 동안 나는 변하지 않았어.”
츠나, 그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보스는 항상 자신 때문에 많은 이들이 변했다고 슬퍼하였고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괴로움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다른 이들은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지만 그 상냥함에 자각하지 않으면 그를 의지하면서, 만약 자각한다 하여도 스스로를 혐오하며 의지했다. 그러기에 고쿠데라 하야토는 츠나가 원하지 않는 더 많은 충성을 바쳤고, 사사가와 료헤이는 자각하지 않은 척 본능적으로 연기했고, 크롬 도쿠로는 여성으로서 줄 수 있는 애정을 바쳤고, 히바리 쿄야는 최대한 모든 것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야마모토 타케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좀 더 츠나의 관심과 동정 연민 죄책감 그 모든 것을 합쳐 사랑만큼 커진 그것을 온전히 받아 드리는 길임을 그는 본능적으로 눈치 채고 있었다.
“나는 타고난 킬러라고.”
분명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모든 일본 미성년자에게 주어지는 교육을 받았으며 평범한 공동체에서 살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을 내어놓고 남의 목을 자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것 봐, 나는 10년 전과 같은 곳에 있어.”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나는 변하지 않았어.”
그는 죽은 자신의 보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기에 남을 죽이는 것보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더 쉬운 너 같은 인간이 될 리도 없고,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남을 죽이는 것이 더 쉬운 이탈리아 마피아계의 적자도 아니야.”
그저, 이렇게 태어나고. 10년 전 옥상에서 한번 죽었고. 10년 전 다시 태어났다.
“나는 그 둘의 무게를 잴 만큼 섬세하지 못해.”
다시 태어나고 분명 무언가가 바뀌었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그냥, 이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해.”
이 세상에는 ‘사와다 츠나요시’가 없다. 자신의 보스이자 친구이자 자신의 목숨과 운명의 주인이 없다.
그가 야마모토 타케시에게 가지는 의미는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여겨지는 그 사랑의 조각보다 컸다. 가난하고 빈곤한 감정을 가진 야마모토 타케시에게 ‘사랑’이라고 정의 내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억지로 끼워 맞춘다고 하여도 그 대상은 사와다 츠나요시일 것이다.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그의 발은 이제 아무것도 밟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자살이라고 부르기에는 모자란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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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에 썼던 글을
2010년도에 고쳤고, 그걸
2014년에 읽고,
2015년에 다시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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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34[앙리미카] 자애
전쟁은 끝났다.
류가미네 미카도는 그 끝난 전쟁에 참전했었다. 일본의 고등학생으로 소년병으로 불러도 좋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전쟁에서 한 무리의 병사를 이끌었다. 전쟁에 참여한 이들 중에서도 지나치게 약한 그가 총수가 되어 전쟁에 참가한 것은 여느 역사 속 전쟁처럼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다. 거창한 대의명분에 의하여 그가 소속된 집단에 봉사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심지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전쟁이 그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옥상 난간에 앉아 전쟁터를 내려 다 보았다. 허무한 무력과 무력이 부딪히고 어린아이의 치기와 어른의 욕망이 만난 공간이다. 딱딱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배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곧 사라질 흔적은 그 배경 위에 존재했다. 그 흔적은 미카도가 전쟁을 더듬기에는 충분했다.
류가미네 미카도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는 웃지 못하였다.
보편적인 인간의 상황 판단 능력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였다. 그 만큼 웃음도 많았다. 길을 가다 흘려들은 농담에도 작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인간이 류가미네 미카도이다. 하지만 지금, 살아남았음에도 그의 입술은 한 일자로 다물려 좀처럼 휘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에 웃었던 남자가 선포하며 명명한 ‘전쟁’은 평범한 일본의 고등학생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경험이었다. 폭력을 업으로 삼는 이들도 놀랄 규모의 무엇인 그 속에 있었음에도 미카도는 그의 충복인 쿠로누마 아오바가 사랑한 미소를 짓지 못하였다.
그 답지 않게 호승심이라도 들은 걸지도 모른다. 이 전쟁은 죽은 자가 승자이다.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이미 웃으며 여자의 목을 끌어안으며 죽었다. 그러므로 살아남은 미카도는 패자이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십 미터가 넘는 공기층을 밟고 있는 그의 발은 이미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달랑거리는 발을 바라보는 눈의 한쪽은 이마가 깨지며 흐른 피가 흘러 들어가 제대로 뜨지도 못하였다. 난간위에서 몸을 지탱하는 손바닥은 잘 갈려져 모래가 박혀있었다. 육체적 고통에 익숙하지 못한 그가 견디기 힘든 아픔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그가 위태롭게 앉아있는 좁은 난간위로 친우이자 전우이며 적이었던 소노하라 앙리가 가뿐히 뛰어 올라섰다. 작은 몸을 가볍게 놀리는 그 모습에 온 몸에 낭자된 자상이 아니라면 기계체조 선수라 소개해도 납득 할 수 있을 것이다.
앙리는 미카도를 향하여 걸어왔다. 미카도와 같은 쪽의 안경알은 이미 깊게 금이 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고집스럽게 그 안경을 쓰고 아무렇지도 않게 좁은 길을 걸었다. 마침내 난간을 짚은 미카도의 왼손 옆에 앙리의 오른발이 놓였다.
그녀도 살아남았다.
언제나 자신의 표정을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미카도는 자신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앙리의 표정이 궁금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사야카가 아닌 소노하라상의 얼굴에 그 감정이 새겨져 있을까?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낱말이 섞여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짓눌린 미카도는 비겁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면, 그의 감정도 억지로나마 정의 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노하라상.”
미카도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피가 말라 붙은 다리가 보이고 다 찢어져 맨살이 드러난 후드 티가 보였다. 미카도는 소노하라의 얼굴을 보기위해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붉은 빛이 도는 것처럼 보이는 눈과 마주쳤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앙리는 전쟁터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미카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안경에 떨어져 산란하는 빛 무리를 만들어 내는 도중에도 그녀는 계속 눈물을 떨어뜨렸다. 미카도가 눈치 챌만한 작은 신음 하나 없이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류가미네군.”
사야카가 아닌 소노하라 앙리가 미카도가 원하던 깊고 맹목적인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앙리의 목소리는 안도로 가득 차 있었다.
살아남아서 다행인 것이 아니다. 사는 것이 다행이 아니라 죽지 않았기에 다행인 것이다. 그녀의 감정은 남아있는 친우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이었다.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것, 그것은 결코 미카도가 원하던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만큼 깊었다.
아니, 남녀간의 사랑이 무엇인가. 기괴하고 비틀린 거리에서 가장 정상적인 사랑은 목이 없는 요정과 그녀를 해부한 의사의 사랑이다.
어느새 미카도의 감정은 앙리의 것과 닮아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전쟁터에서 겨우 발견한 것이다. 미카도는 몸을 돌려 아슬아슬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고쳤다. 발판 없는 곳에서 덜렁거리던 발 중 한쪽이 옥상의 바닥을 밟으며 그의 몸은 확실하게 고정되었다. 발목은 시큰 거렸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팔을 뻗어 앙리의 손을 잡았다. 양쪽 모두 단단히 잡아당기는 그의 행동에 앙리는 난간에 무릎을 꿇었다. 미카도에게 앙리는 유혹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한 미련도 잊으며 그녀만 본다면 분명 편할 것이다.
성실하게 몸에 익힌 가치관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러한 가치관을 따라 행동하는 무리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이다. 비일상을 동경하며 살아온 그이며 비 일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의지할 곳이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녀가 그의 행동의 기준이 된다면 류가미네 미카도는 웃거나 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노하라상. 부탁이야. 언제나처럼 내 곁에 있어 줘.”
머릿속에서 그러한 알고리즘을 연산하기도 전에 미카도는 이해했다.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을 동정하는 앙리에게 매달렸다.
“응.”
앙리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미카도를 품에 안고 팔 안에 가두었다. 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그를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드러난 젖가슴이 미카도의 머리에 닿았다. 하지만 미카도는 흥분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심했다.
그렇게 류가미네 미카도와 소노하라 앙리는 서로에게 매달려 한참 동안 부둥켜안고 있었다. 미묘하게 다른 두 사람의 체온이 같아질 무렵에 미카도는 문득 팔을 풀고 떨어졌다. 두 사람은 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날 베어도 좋아.”
그것은 류가미네 미카도의 청혼이었다. 결혼이라는 형식은 아니었지만 상대와 영원히,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은 것을 고백한다는 맥락에서 청혼과 닮아있었다. 앙리의 어딘가에서 사야카가 외쳤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눈앞의 인간을 사랑하라고. 그래서 앙리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해.”
소노하라 앙리는 언제나 몸속에서 울리던 말을 내 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앞의 인간을 베지 않았다. 온전한 그녀의 마음이었다.
마주보는 미카도와 앙리의 눈에 미래가 흔들리며 지나갔다.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쇠붙이의 사랑에 몸이 녹슬고 많은 아이를 가진 소노하라 앙리에게 성욕은 존재하지 않는다. 친우와 적에게 보내는 감정까지 긁어모아 앙리에게 집중하는 류가미네 미카도가 그러한 상대를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하며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다. 타인에게는 연인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상관없다. 마사오미가 그들을 떠났을 때부터 자신들이 그러한 사이였다는 것을 지금의 류가미네 미카도와 소노하라 앙리도, 그리고 미래의 두 사람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전쟁이 끝난 날, 상처투성이의 그들은 함께 잠이 들었다.
일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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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33[사사나가] 하늘
네가 보잘것없는 내 품에 안겨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같잖은 우월감을 느꼈다. 그것은 네가 이 지구 상에서 가장 강한 '생물'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감상이었다. 그렇게 강한 생물이 지금 내 아래에 있다. 속이 빈 뼈다귀로 이루어진 조류는 그 사실에 노골적으로 흥분했다.
그리고 자신의 천박함을 깨닫는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서늘함을 느꼈다. 들뜬 흥분과 열이 오른 뇌가 급하게 식어갔다. 정복감에 힘이 들어갔던 물건도 어느새 흐물흐물해졌다.
성년과 미성년. 동성. 타인의 시선. 그 밖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너와 나는 이러한 관계를 맺었다.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떳떳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쾌락이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지극히 사랑할 뿐이다.
결벽증 적으로 순수한 사랑은 면죄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면죄부를 자신이 찢어버렸다.
어떻게 너에게서, 그 방에서, 그 침대에서 도망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남겨진 연인이 느낄 배신감을 고려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만큼 나의 그릇은 작고 작았다. 너를 품기에 나는 너무나 작았다. 나는 네 앞에서 그전처럼 떳떳할 수 없었다.
나는 널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
"선배. 나랑 말 좀 해요."
아직 초등학생인 혜나가 결근한 날이었다. 너는 나를 불러세웠다. 그러더니 내가 대답을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하늘로 이동했다. 조금만 올라가면 새도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높은 하늘로. 평범한 인간보다 떨어지는 폐활량 때문에 입을 맞출 때도 헐떡거리기 일쑤인 너지만, 인식조차 하지 않고 사용하는 초능력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었다.
"말해요."
왜 그날 그렇게 가버렸어요? 왜 날 피해요? 왜 나에게 변명하지 않아요?
너의 요구에 나는 고개를 숙여 까마득하게 멀어진 땅만을 바라보았다. 차마 눈을 뜨고 곧게 바라보는 네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미아네."
결국 나오는 것은 무의미한 사과였다.
내 날갯짓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하늘, 아무도 우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곳에서도 나는 솔직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볼 수는 없지만, 너는 날 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 나는 널 사랑할 자격이 없으면서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과할 지언정, 나의 천박한 모습을 들키기 싫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네가 나를 경멸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참 그렇게 제 발아래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을까,
"윽"
"선배."
강제로 꺾여진 고개에 시야가 바뀌었다. 너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눈은 곱게 접혀 있었고, 입꼬리는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나는 네가 눈을 감고 있어도 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너는 내가 아래에 두면서 우월감을 느낄만큼 무척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다는 소심한 반항이 네 심기를 건드린것이 틀림없었다. 당겨져 허공에 고정된 날갯죽지가 뻐근히 아파져 왔고 손발은 어느새 저들끼리 쌍쌍이 붙어 손가락 발가락 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내 몸에 꼭 맞게 만들어진 투명하고 단단한 관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선배가 절 아무리 싫어해도."
널 싫어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내 짧은 혀가 내뱉는 어설픈 발음 따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 투명한 관은 코 아래까지 올라가 입을 막았다.
"선배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원해도."
내가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너와 이런 관계가 되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았을 것이다.
너의 차가운 손이 내 볼에 닿아 미끄러졌다. 역시 고도 때문에 기온이 너무 낮은 걸까, 네 교복만으로는 체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감기가 걸리면 안 되는데.
"선배가 저에겐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너와 함께 하기엔 너무 천박한 사람이기에 견딜 수 없는 것뿐이다. 나는 얼토당토않는 오해를 고쳐주고 싶었기에 몸을 뒤틀었다.
"선배는 제거에요."
날개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선배는 스푼에서 더는 필요하지 않겠죠? 선배는 그날로 직장을 잃는 거에요. 그렇다고 해도 선배가 잘생겼고 잘생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아마 전 그땐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거에요.
하늘에서 내려와 주세요.
너는 내 머리칼과 귓바퀴가 내 날개라도 되는 양 잡아당겼다. 우릿한 고통이 나는 기뻤다.
나는 천박한 남자다.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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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015. 2. 22. 16:32[모래나가] 악당
특기자로서 나가의 삶은 절제의 삶이었다.
끝을 모르는 가능성을 잘라 규격에 맞춘다. 그것은 상식이었고 인격이었으며 본성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 규격은 어느 쪽이든 극한으로 엇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평범한 사람'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가는 평범한 사람 수준의 욕심과 정의감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진짜' 평범한 이들과 차이 나는 점이 있었다. 그들은 체념을 통해서 터득하는 것을 나가는 학습을 통해서 사사받은 것이다.
그 별거 아닌것 같은 차이는 나가가 스스로 칭하는 '평범한 일상'때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가는 스푼이라는 '비일상'적인 기관에 속해버렸다.
알던 사람이 죽는다. 자신이 위험에 처한다. 적이 죽는다. 그리고 그러한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은 경험이 쌓인다. 그와 동시에 나가 자신이 강했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터득과 배움의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
절제는 억제를 불러왔다.
"숨쉬는 것만큼 쉬웠지. 별다른 죄책감도 없었어. 그는 악당이니까."
나가는 오랜만에 뇌 속을 파고든 과거에 눈을 떴다. 꿈인지 회상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자의적 해석이 없었으며, 회상이라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솔직히 죽인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뒤의 붉은색과 흰색의 대비가 너무 강렬했다. 무척이나 맑은 날의 대낮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잘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더 이상 잠은 오지 않는다.
그저 그 백모래의 시체를 기점으로 단편적인 것들이 떠오른다. 일단 오수는 틀렸다. 자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어긋났다. 힘에 어울리지 않는 평범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죄라고 한단 말인가. 나가는 스스로 죄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죄라고 칭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떠오른다. 명백한 적의와 공포의 시선이. 그리고 무분별하게 쏟아진 악의가. 어느 한계까지는 나가도 이해했다.
누구인 줄 모르겠지만 선량하고 아름답게 생긴 남자가
-악당인 백모래가
아무런 동정도 안타까움도 표현하지 않는 소년에게
-히어로인 자신에게
무참하게 머리를 포함한 사지가 찢어지는 방법으로 살해당했으니까.
나가도 자신이 심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마움 없이 비난만을 반복했다. 그것은 백모래가 명백한 악당인 것도,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과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나가의 강력한 힘이었다.
'너라면 인도적으로 제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가는 곧 그것이 핑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나가를 더 이상 '강력한 힘으로 자신을 지켜주는 히어로'가 아니라 '잔인한 살인마' 혹은 '위험인물'로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가는 악당이 되었다.
그런 영웅이 싫다면 악당이 되어주마.
특별한 야망도, 삐뚤어진 가치관도, 선천적 불행도 모두 가지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악당이 될 가능성이 한없이 0에 가까웠던 나가는 악당이 되었다. 의식적으로 억제하던 무언가의 한계가, 교육받은 가치관이, 부조리한 비난을 통해서 부서졌다.
영웅이 되는 것도 쉬웠지만, 악당이 되는 것은 그보다 더 쉬웠다.
"백모래 당신이 옳았네."
문득 나가는 그의 유언 아닌 유언이 떠올랐다. '무고한 시민을 인질로 삼은 악당의 작태'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났던 영웅으로서의 나가는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었다. 악당이 하는 헛소리니까. 하지만 지금은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해 놓았던 것처럼 선명히 들린다.
날 죽이고 영웅이 되. 그리고 나와 같은 곳으로 오는거야.
그 말을 하고 그는 웃었던가? 아니면 웃기도 전에 피와 살이 뭉개진 고기 덩어리가 되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가는 '영웅'이었을 적에는 느낄 수 없었던, 그의 일반적인 정의감으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 차오름을 느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통찰에 가깝기도 했다. 논리의 비약이나, 확신이기도 했다.
"백모래 당신은... 정말 사랑을 했구나."
그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하지만 그 대신 지독한 순수함에 대한 감동이 있었다.
나가는 왠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악당이 된 보답으로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필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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